대만의 ‘남한’ 명칭 보복은 단순한 행정적 마찰을 넘어, 다가올 대만 지방선거를 겨냥한 내부 결집과 최근 해빙 무드를 맞은 한·중 관계를 견제하려는 고도의 지정학적 노림수로 분석된다.
작성자: 국제외교팀
작성일: 2026년 3월 20일
최근 한국과 대만 간에 명칭 표기를 둘러싼 외교적 마찰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표면적으로는 출입국 전산 시스템상의 단어 하나를 둘러싼 갈등처럼 보이나, 그 이면에는 대만의 상처받은 민족주의 정서와 다가오는 선거를 앞둔 국내 정치적 셈법,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려는 한국의 냉혹한 외교적 딜레마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20년 넘게 유지된 관행이 왜 하필 지금 외교적 뇌관으로 작용했는지 객관적 사실관계와 지정학적 맥락을 바탕으로 본 사태의 본질을 심층 분석한다.
20년의 침묵을 깬 대만의 돌연한 항의
이번 갈등의 출발점은 한국 법무부가 도입한 전자입국신고서 시스템이다. 해당 시스템의 출발지 및 목적지 항목에 대만을 ‘중국(대만)’으로만 선택할 수 있게 설정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러나 사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대만의 문제 제기 시점과 방식은 다소 의아한 측면이 있다. 한국 정부는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 단교한 이후 국제사회의 보편적 기준인 하나의 중국 입장을 존중해 왔다. 이에 따라 이미 2004년부터 국내에 장기 거주하는 대만인의 외국인등록증 국적 란에 ‘China(Taiwan)’라는 표기를 사용해 왔으며, 대만 정부는 지난 20여 년간 이에 대해 공개적인 외교적 항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지난해 12월부터다. 대만 외교부가 돌연 강경한 태도로 수정을 요구하고 나섰고,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한국이 대만으로부터 막대한 무역 흑자를 내고 있음을 거론하며 대만인의 자결권을 존중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이에 대해 12월 11일 박일 한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우리 정부는 타이완과 비공식 실질 협력을 계속해서 증진해 왔고,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이런 기본 입장 아래 다루어 나갈 것이라며 사실상 기존의 표기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이었다.
한국이 즉각적인 수정을 거부하자 대만 외교부는 양자 대등의 원칙을 명분으로 내세워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올해 3월 1일부로 대만 내 장기 체류 한국인에게 발급하는 외국인 거류증의 국적 표기를 공식 국호인 ‘한국’에서 ‘남한(South Korea)’으로 강제 변경한 것이다. 아울러 3월 말까지 한국이 표기를 수정하지 않을 경우, 전자입국등록표에서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명칭에 담긴 의도와 엇갈린 대중의 반응
대만이 보복의 카드로 남한이라는 명칭을 선택한 데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공식 국호인 대한민국을 배제하고 굳이 남한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북한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하여 한반도가 분단국가라는 약점을 찌르려는 목적이다. 즉, 온전한 자주 국가로서의 대표성을 깎아내려 한국 정부에 외교적 모욕감을 주겠다는 의도다. 대만 언론들은 이를 두고 외교부가 강경하게 반격에 나섰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덴마크 등 유럽 국가에서도 대만인을 중국 국민으로 표기하자 덴마크 외교관의 특권을 축소하는 등, 현재 대만 사회에는 국제사회에서의 노골적인 대만 지우기에 대항하는 강한 민족주의 정서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만의 치밀한 의도와 달리 정작 한국 내 여론은 실질적인 타격이 없다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일상생활에서 남한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이 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북한과 명확히 구분되어 나쁠 것이 없다는 실용적인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러한 무반응에 대만의 강경파들은 한층 더 자극적인 언사를 동원하고 있다. 대만 국민당의 라이스바오 입법위원은 의회 질의에서 남한이라는 호칭은 너무 약하다며, 그들을 자극하려면 북한식 표현인 ‘남조선’이라 부르거나 수도 서울을 과거 명칭인 ‘한성’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대만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독도나 동해 표기를 일본식으로 바꾸자는 극단적인 혐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하는 대만 내부의 깊은 외교적 소외감이 주변국을 향한 날 선 분노로 표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해빙 무드 견제와 선거를 겨냥한 포석
전문가들은 20년 넘게 조용히 유지된 표기를 대만이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문제 삼는 진짜 이유는 명칭 그 자체가 아니라 지정학적 메시지 발신과 국내 정치에 있다고 분석한다. 첫째는 한·중 관계 개선 모멘텀에 대한 강력한 견제다. 최근 한국과 중국은 갈등을 관리하며 관계를 안정화하려는 해빙 기류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무력 침공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대만은 한국이 중국 측으로 과도하게 밀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즉, 명칭 문제를 지렛대 삼아 대만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다는 견제성 메시지를 대내외에 발신한 것이다.
둘째는 오는 11월로 예정된 대만 내 대규모 지방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포석이다. 라이칭더 총통이 이끄는 집권 민진당은 지지율 결집이 절실한 상황이다. 반중 정서와 대만 주체성 확립이라는 핵심 여론을 자극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의도적으로 부각하며 내부 지지층을 결속시키고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반면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은 한국의 조치에 대해 하나의 중국 원칙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인식이라며 사실상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중국 관영 매체와 네티즌들이 이번 사태를 관망하며 남조선이라고 불러야 겨우 반응할 것이라며 대만을 조롱하는 것도, 한·대만 간의 소모전이 자국에 불리할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전략적 모호성과 향후 한·대만 관계 전망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국은 극심한 외교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 대만의 요구대로 전산 시스템의 중국 표기를 단독으로 지울 경우, 이는 1992년 수교 이후 유지해 온 하나의 중국 존중 기조를 훼손하는 것으로 비쳐 중국과의 거대한 외교적 마찰을 야기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일본의 우익 인사들이 대만 유사시는 일본의 유사시라며 친대만 노선을 강화하자,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의 방공식별구역을 무단 진입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바 있다. 한국 외교부 입장에서는 시스템상의 단어 하나가 한중 관계를 뒤흔들 뇌관이 될 수 있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격화되는 감정싸움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낮다. 한국과 대만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떼어낼 수 없는 강한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띠고 있으며, 2025년 기준 대만은 한국에 275억 달러라는 막대한 무역 흑자를 안겨준 핵심 교역국이다. 연간 약 300만 명이 오가는 관광 및 인적 교류의 토대 역시 매우 견고하다. 린자룽 대만 외교부장 역시 한국 정부가 종이 입국신고서와 전자 신고서를 병행하는 등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공식 전산 시스템의 전면 수정은 유보하되, 대만인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전자 시스템 대신 국적을 자유롭게 기재할 수 있는 종이 신고서 방식을 우회적으로 허용하는 기술적 타협을 통해 갈등의 수위를 조절할 가능성이 크다.
명칭을 둘러싼 이번 외교적 마찰은,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 주체성을 인정받으려는 대만의 절박한 몸부림과 국익을 위해 강대국들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냉혹한 외교적 현실이 정면으로 충돌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